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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분자] 아름다운 빚, ‘소망’으로 갚는다

팬데믹 중 암수술 받고 회복 먼저 떠난 남편 잘할걸 후회 팔순 생일, 장례식 리허설로 결실 거둔 '소망소사이어티' 1800여명 시신 기증 공감대 시니어책자·소망동산이 꿈 암이라고 했다. 재작년 11월 딸의 성화에 못 이겨 유방암 검사를 받았다. 의사의 진단은 갑작스럽다. 대부분 환자들이 그렇듯 나도 믿기 어려웠다. 여든이 넘었지만 아직 건강했고, 자각 증상도 전혀 없었다. 2007년 소망소사이어티를 창립해 10년이 넘도록 ‘품위있는 죽음(well-dying)’을 외쳐온 내게도 ‘암’은 여전히 두렵고 무서운 단어였다. 다행히 초기에 발견돼 지난해 1월 수술을 받았고 20차례 방사선 치료과정을 거쳤다.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 외부활동을 못하니 쉬면서 오히려 빨리 회복할 수 있었다. 치료를 받으면서 삶과 죽음이 동전의 앞뒷면이라는 말을 체감했다. 삶 쪽으로 놓인 동전은 언제 뒤집힐지 모른다. 어떻게 뒤집힐지는 더더욱 모른다. 뒤집히면 죽음인데 대부분 뒤집힐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한다. 하고 싶지 않아서다. 암 진단에 두렵긴 했지만 절망하진 않았다.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을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소중한 사람들을 초청해 세상과의 작별파티까지 이미 치렀다. 다만, 아직 못다한 마무리에 마음이 급해졌다. #작별 리허설, 팔순 잔치 평소 아이들에게 내 장례식은 치르지 말라고 부탁해 왔다. 비우고 떠나고 싶어서다. 대신 내가 아직 살아있을 때 생전 장례식을 치르고 싶었다. 2015년 10월20일 팔순 잔치를 세상을 떠나는 작별 파티의 예행연습으로 열었던 이유였다. 장례식 리허설이라고 생각하니 하객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귀하고 반가울 수 없었다. 각계 인사들의 축사 후 동영상을 통해 지난 80년 내 삶이 소개됐다. 1968년 서른셋에 간호사로 미국에 취입 이민온 후 사회활동이 주로 담겼다. 쉴 틈 없이 달려온 반백 년 이민사였다. 간호사 한 사람이라도 더 RN 시험에 합격시키려 발 벗고 뛰었던 70년대, 고 이태영 박사를 만나 LA에 가정상담소를 발족시켰던 80년대, IMF 사태로 어려운 한국의 아이들을 돕자고 나라사랑어머니회를 결성했던 90년대, 소망소사이어티를 발족하고 아프리카까지 날아가 우물을 팠던 2000년대부터 지금까지…. 감사인사를 하러 연단에 서서 하객들을 살펴보니 감격의 눈물이 쏟아졌다. ‘이 생애를 이분들과 함께했구나, 굽이굽이 삶의 여정에 이분들이 동행해 주셨구나’ 감회가 새로웠다. 긴 인사를 준비했지만 입으로 나온 말은 짧았다. “정말 고맙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남편을 먼저 보내며 장례식 리허설을 열겠다는 결심엔 ‘사랑하는 이가 옆에 있을 때 좀 더 잘할 걸’이라는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 2011년 11월9일 남편과 사별하면서 마음이 아파 무척이나 힘들었다. 남편은 인자하고 멋진 사람이었다. 함께 이민생활 여러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자식들 결혼시켜 이제 좀 여유롭게 살만하다 싶었는데 2000년 당뇨병 진단을 받았다. 상태는 점점 악화했고 발병 4년 후부터는 신장까지 나빠져 매주 3번씩 투석을 해야했다. 의사는 6년을 넘기 어렵다고 했는데 11년을 더 살다갔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 병상에 가족들이 모였다. 아들에겐 “엄마 힘드니 운전시키지 마라”고 당부했고, 딸, 사위, 손자, 손녀들 손을 일일이 잡고 눈을 마주치며 유언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내게 말했다. “정말 미안해, 사랑해, 용서해줘” 그 세 마디에 50년 결혼 생활에서 쌓였던 서운함이 순식간에 녹았다. 후회가 밀려왔다. ‘왜 좀 더 잘하지 못했을까’하는. 죽음 준비에는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았던 사람들과의 관계 정리가 포함된다. 아니, 어쩌면 그게 가장 큰 부분이다. #단단해진 소망, 고마운 이들 소망소사이어티는 내일 이 세상을 떠난다 해도 후회할 일 없도록 돕는 단체다. 2007년 설립 당시 난 홀로 적진에 뛰어드는 장수 같은 기분이었다. 죽음 준비 단체를 설립하겠다고 말하면 대부분 난색을 표했다. “나이를 생각하시고 이제 그만 좀 쉬세요.” “좋은 일 다 두고 왜 하필 죽음입니까?” “한인사회에선 그런 캠페인 안 먹힙니다.” 죽음 준비에 고개를 흔들던 한인사회에서 지난 14년간 소망소사이어티가 거둔 결실은 기적이다. 1200달러 이상 기부한 평생회원이 262명, 시신 기증 서약자가 1843명, 소망유언서 작성자는 1만4000여 명에 달한다. 소망소사이어티 동역자들과 이사진, 회원들의 헌신 덕분이다. 최경철 사무총장, 김미혜 사무국장, 김창곤 홍보실장, 남궁수진 사역팀장, 임제인 행정팀장, 박근선 차드 지부장, 박순빈 샌디에이고 지부장, 장희숙 새크라멘토 지부장의 능력과 열정은 눈물겹다. 정영길·김용화·이경미·최희선·황치훈·고새라·박유진 이사, 김정빈·서동성·정진홍·김옥라·그레이스 김·이정근·박용필·김종철·장두천 고문, 유태윤·김병희·조앤 이 홍보대사의 지원이 아니었다면 소망은 뿌리내리기 어려웠다. 지면을 빌어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그동안 함께 일해온 매일이 생일이었고, 매일이 크리스마스인 것처럼 설레고 행복했다. #소망동산을 꿈꾸며 내겐 남은 소망이있다. 마땅한 후임자를 구하고 재정을 더 단단히 다져야한다. 2가지 큰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다. 첫 번째는 한창 작업중인 ‘시니어 생활·건강 가이드’ 책자다. 만 65세가 돼 메디케어를 받는 시점부터 장례까지의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노년 생활 총정리 백과사전이다. 총 500쪽, 올 컬러로 제작될 가이드엔 노인성 질환, 간병인, 응급실 및 앰뷸런스 이용, 양로시설, 치매, 묘지 구입, 화장, 시신 본국 이송 등 다양한 건강 관련 정보가 수록된다. 또 노인 아파트 입주, 상속, 세금보고, 관련 기관 및 단체, 의료진 명단도 싣는다. 9월에 1차로 1만5000부를 출간해 무료로 배포할 예정이다. 예산 지원이 절실하다. 마지막 꿈은 ‘소망 동산’ 설립이다. 영어로는 ‘Peace Village’로 지었다. LA에서 멀지 않은 시골에 아담한 부지를 마련해 뜻이 비슷한 사람들이 함께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은퇴촌을 조성하고 싶다. 텃밭에서 농사짓고, 함께 밥을 지어먹고 산책하고 대화를 나누며 즐겁게 살아가는 그림을 그려본다. 기금이 많이 드는 일이니 내 생전에 이뤄지리라는 보장은 없다. 내가 못한다면 누군가 꿈을 이어받아 대신 실현해주길 바란다. 선한 일에 기부해준 모든 분들에게 난 갚을 수 없는 아름다운 빚을 졌다. 그 빚을 소망을 통해 갚으려 한다. 아직 쉴 수 없다. 부지런히 달리고 또 달린다. ▶도움 주실 분들:(562)977-4580 소망소사이어티 정구현 기자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2021-04-21

[유분자] 팔순에 '생명 우물' 찾아 아프리카로

2007년 사업 정리하고 은퇴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 고민 웰다잉 홍보 비영리단체 설립 아프리카서 우물파기 11년째 451개·모금액 168만불 달해 소망학교 5개 세워 교육까지 2010년 2월26일. 한밤중에 도착한 공항은 어둡고 으스스했다. 어둠침침한 조명 아래 모기들이 떼지어 날아다니고, 검은 피부의 무장한 군인들은 매서운 눈초리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스물두 시간의 긴 여행으로 몸은 녹초가 되어 있었다. LA에서 파리로, 다시 파리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여섯 시간을 날아왔다. 팔순을 앞두고 몸은 지쳐있었지만, 가슴 저 밑에선 따스한 기운이 솟아나고 있었다. 기쁜 설렘이었다. 도착한 곳은 아프리카의 최극빈국 차드다. 극심한 식수난에 오염된 물을 마셔 병든 사람들에게 우물을 파주기 위해 왔다. 지구상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나라를 찾아온 계기는 ‘소망’ 때문이다.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소망과 2007년 창설한 ‘소망소사이어티’의 구호사업이 척박한 땅으로 나를 이끌었다. #삶의 마무리, 생명의 시작 2007년 32년간 운영해온 프렌차이즈 외식업체 ‘비지비(Busy Bee)’를 양도했다. 일흔을 넘겨 이젠 좀 쉬어도 되겠다 싶었다. 한가롭게 살자고 은퇴를 했지만 하루하루 지날수록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선 뭔가 할 일을 찾고 있었다. 한인사회에 꼭 필요한데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어야 했다. 은퇴한 시니어로 삶의 마무리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죽음을 맞을 수 있는지 방법을 가르쳐주는 이가 없었다. 간호사 경력을 바탕으로 ‘아름다운 삶과 마무리’라는 주제의 강연을 시작했다. 하면 할수록 죽음 준비에 대한 계몽이 필요하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 확신은 비영리재단인 소망소사이어티 창립으로 이어졌다. 사업체를 정리한 지 6개월만이었다. 품위있게 늙는 ‘웰 에이징well-aging)’, 아름답게 삶을 마감하는 ‘웰 다잉(well-dying)’을 목표로 한 소망소사이어티의 첫 시작은 유언서 쓰기 캠페인이었다. 그후 장기·시신 기증 캠페인, 호스피스 교육, 장례절차 간소화 운동으로 가지를 뻗어나갔다. 소망의 길은 자연스럽게 기부 문화 확산으로 이어졌고 2009년 한국의 국제구호단체인 굿네이버스의 이사장인 이일하 목사를 만났다. 아프리카에서 우물파기 프로젝트를 함께 하자 결심했다. 삶의 마무리에 생명을 살리는 일만큼 의미있는 웰 다잉은 없을 것이었다. 간호사복을 입은 지 55년 만인 2010년 생명을 구하러 검은 대륙으로 향했다. #‘꿀꺽꿀꺽’ 생명의 소리 차드는 ‘아프리카의 죽은 심장’으로 불린다. 아프리카 한복판에 있는 내륙국으로 바다에서 격리된 지리적 악조건과 척박한 사막기후가 나라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모두가 가난해서 가난이라는 단어조차 없는 나라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20년 현재 차드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741달러로 미국(6만8309달러)의 1%다. 인구 1620만 명의 80%가 하루 1.9달러를 벌지 못하는 세계 5대 극빈국이다. 기대 수명은 53세밖에 되지 않는다. 생명을 구하러 팀을 꾸렸다. 굿네이버스, 미주중앙일보와 함께 ‘소망우물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굿네이버스의 이병희 국장, 미주중앙일보의 정구현 기자, 권홍량 목사와 딸 해나, 그리고 나까지 5명이 1차 원정대로 그곳을 찾았다. 현장에서 목격한 광경은 차라리 참상이었다. 쩍쩍 갈라진 메마른 땅에서 아이나 어른이나 목이 말라 거친 숨을 몰아쉬었고 갈증을 흙탕물로 가셨다. 정확히 말하면 흙탕물이 아니라 짐승의 대소변이 섞인 ‘오물’이다. 살려면 물을 마셔야 했고 그 물을 마셔 죽어나가는 속수무책의 잔인한 선택이 그들의 삶이었다. 차드에선 8초마다 한 명씩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도착 이튿날부터 수도 은자메나의 남쪽 은두라는 작은 마을에서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차드에서 죽은 물과 산 물은 깊이 40m에서 나뉜다. 위로는 썩은 물이 고이지만 그 아래 물은 마실 수 있다. 사흘 후 1호 소망우물이 터졌다. 맑은 물이 콸콸 쏟아지자 온 마을이 환호했다. 어린아이들은 우물꼭지에 입을 대고 ‘꿀꺽꿀꺽’ 물을 마셨다. 동네 이장은 울먹이면서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맑아야 할 아이들이 맑아야 할 물을 마시는 당연한 장면이 그곳에선 감격이었다. 그들의 소망은 곧 내 소명이었다. 기적을 만든 한인들 돌아와서 소망우물 캠페인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우물 1개 설치비용은 당시 3000달러였다. 40개만 설치해도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미주중앙일보에 ‘피눈물 흘리는 아이들’이라는 제목<본지 2010년 3월11일자 A-1면>으로 5차례 연재됐다. 한인들은 듣도 보도 못한 먼 나라의 비극에 함께 울었다. 기적이 이어졌다. 전국에서 성금이 답지했다. 3주 만에 후원금은 당초 목표했던 40개를 넘어섰다. 2008년 금융위기에 장기불황에 허덕이던 때다. 아끼던 결혼 반지를 팔아서 성금 200달러를 기부했고, 한 공무원은 한푼 두푼 월급을 쪼개 2년간 모은 현금 3000달러를 쾌척했다. 노인들은 웰페어를 봉투에 담았다. 여섯살난 중증장애아 아들을 하늘로 먼저 보낸 부모는 아프리카의 “내 아들같은 아이들”을 위해 기부했다. 그 아름다운 사연들은 11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현재까지 소망소사이어티를 통해 차드에 놓여진 우물은 목표의 10배가 넘는 451개다. 우물 1개면 지역주민 1000명이 혜택을 받는다. 한인들의 동참으로 최대 45만명에 달하는 차드 국민들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게됐다. 우물 프로젝트는 차드에서 ‘소망학교’ 설립으로도 발전했다. 오늘의 갈증을 해결했으니 아이들에게 내일의 삶을 선물하고 싶었다. 2013년 1호 학교(숙경 앨런, 유진·캐롤 최, 미키 권씨 기부)가 세워진 이래 5개교가 차드에 설립됐다. 아직도 1호 학교 개교식을 기억한다. 500여명이 모인 동네 잔치로 치러진 그 자리에서 나는 “공부 열심히 해서 큰 사람이 되라”는 격려의 말을 하다가 울고 말았다. 그동안 우물과 학교를 세워달라고 한인들이 보내준 후원금은 168만4200달러에 달한다. 생각해보면 물은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 땅 밑에서 퍼올리지 못했을 뿐이다. 현실에 쫓겨 사는 메마른 우리 마음 깊은 곳에도 사랑의 우물은 있다.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나눔은 생명을 살린다. ▶도움 주실 분:(562)977-4580 소망 소사이어티 정구현 기자 [email protected]

2021-04-14

[유분자] 가족식당으로 출발 수백만불 기업으로

홀로 이민 와 6형제 모두 초청 ‘나성파’ 유씨, 5대 134명으로 가족 정착위해 73년 식당 개업 2년 뒤 프랜차이즈 비지비 설립 갈비샌드위치 원조 K푸드 성공 소스 개발하며 14개 지점 확장 97년 한국 에버랜드로 ‘역수출’ “아이고, 이게 얼마 만이유, 하나도 안 변하셨네유~” 1999년 12월25일. 역사적인 밀레니엄을 엿새 앞둔 성탄절에 디즈니랜드 인근의 더블트리호텔 로비는 우리말로 시끌벅적했다. 다들 느린 듯 말끝이 올라가는 충청도 특유의 사투리로 서로 반겼다. 이날 모임의 공식 명칭은 ‘문화 유씨 나성(LA)파 가족 모임’이다. 나성파는 유분자라는 작은 밀알 하나로 미국에서 뿌리내렸다. 1968년 12월12일 간호사로 취업이민 온 나는 1972년부터 1975년까지 4년 동안 형제 6명을 모두 미국에 초청했다. 그 직계 가족 3대 87명이 이날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시종일관 가슴 벅찬 감동이었던 모임은 1999년 12월27일자 미주중앙일보 1면에 소개되기도 했다. 22년이 지난 지금, 3남4녀 우리 형제 중 나와 남동생만 살아있고 언니오빠들은 모두 돌아가셨지만, 유씨 나성파 가지는 5대, 134명으로 더 무성해졌다. 가족들이 미국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해준 일등공신은 34년간 운영했던 ‘비지비(Busy Bee)’다. 유씨 나성파 생계의 원천이자 한식 세계화의 원조 식당이다. #핫도그 굽고 감자 튀기고 인생은 ‘필연’이라는 씨줄과 ‘우연’이라는 날줄로 만들어진다. 내 인생에서 가장 굵은 필연은 간호사가 된 것이고, 생각지도 못했는데 삶 깊숙이 파고든 우연의 날줄은 요식업에 종사하게 된 것이다. 미국에 온 뒤부터 난 무조건 월급의 4분의 1을 저축했다. 차차 경제적으로 안정됐고 곧 목돈을 쥘 수 있었다. 자연스레 가족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목표가 됐다. 그리고 이민 5년만인 1973년, 셋째 소자 언니가 요식업이라는 우연의 길로 날 밀어넣었다. 가족이 힘을 모아 식당을 하자고 했다. 갓 이민와 영어가 서툴고 직장이 필요했던 가족들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는 최고의 아이디어였다. 1973년 7월 애너하임의 ‘페드마트(FedMart)’라는 할인 매장내 스낵바를 인수해 첫 식당을 열었다. 운영은 내가 하고 주방은 셋째 언니가 책임졌다. 햄버거, 핫도그, 감자튀김을 팔던 스낵바는 우리 가족의 ‘식당 실습장’이었다. 가게가 잘되자 확장을 꿈꿨다. 둘째 화자 언니도 의기투합했다. 2년 뒤 부에나파크 샤핑몰내 ‘테이스트 모슬’이라는 음식점을 인수했다. 주방을 맡은 둘째 언니는 부여에서 30여 년간 한정식 식당을 운영한 경험이 있었다. 한식에 자신 있었던 언니는 국적 불명의 샌드위치를 개발해 팔았다. 샌드위치에 햄 대신 불고기나 갈빗살 구이를 넣어 불고기 샌드위치, 코리안 바비큐 샌드위치라는 이름을 붙였다. 듣도보도 못한 메뉴는 큰 히트를 쳤다. 당시로선 국적 불명 음식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K푸드의 원조였다. 가게가 안정되자 언니가 더 큰 그림을 제안했다. 프랜차이즈 식당으로 키우자고 했다. 내가 첫 식당을 개업한 1973년 팬다 익스프레스가 처음 문을 열었고 두 번째 식당을 시작한 1975년 요시노야가 미국에 처음으로 진출 했다. 우리라고 못할 것 없었다. 한식을 주메뉴로 꾸미고 1975년 7월 간판을 바꿔달았다. 비지비 1호점의 탄생이었다. #일벌 같은 식당, 비지비 40대 초반이었던 당시는 내 인생에 가장 바쁜 시기였다. 아침엔 간호협회장, 낮엔 식당 사장, 밤엔 간호사로 시간을 쪼개 살았다. 친구의 남편은 그런 내가 부지런한 일벌과 닮았다면서 식당 이름을 부지런한 일벌이라는 뜻의 ‘비지비’로 지어줬다. 암컷인 일벌은 몸집은 가장 작지만 모든 생존 활동을 도맡아 한다. 집짓고, 먹이를 찾고, 천적과 싸우며 새끼까지 키운다. 비지비 초기에는 정말 일벌처럼 온가족이 식당에 매달렸다. 주방에선 언니들과 손아래 올케 둘이 일했고, 웨이트레스와 캐시어는 조카들이 번갈아 맡았다. 모든 식구가 열심히 일한 덕분에 비지비는 나날이 발전했다. 1986년 2호점을 연 이후 2005년 8월 14호점까지 확장했다. 성공의 원동력은 둘째 언니(2020년 작고)다. 1974년 마흔 일곱에 미국에 온 화자 언니는 2007년 비지비를 매각할 때까지 여든의 나이에도 앞치마를 두르고 식당에서 일했다. 나는 언니와 완벽한 콤비를 이뤄 16가지 자체 소스까지 개발해 주문자생산방식(OEM)으로 판매했다. 첫 달 매출 800달러 식당으로 시작한 비지비는 10여년만에 연매출 수백만달러를 버는 기업으로 성공했다. 비지비는 기업이기 이전에 존재 자체로 한식과 한국의 홍보대사였다. 1호점 간판에 영어와 한글을 병기했는데 당시 쇼핑몰내 한글 간판은 우리가 유일했다. 식당 내부에는 한식을 소개하는 영문 포스터를 제작해 붙였다. 간판과 포스터는 14호점을 열 때까지 비지비의 전통으로 이어졌다. LA타임스는 1992년 9월28일자 ‘마켓 앤드 머니(Market & Money)’ 섹션 1·4면을 할애해 비지비의 성공 사연을 크게 보도했다. #삼성과 손잡고 한국으로 사업이 탄탄대로를 걷던 1996년 가을이었다. 비지비로 전화가 왔다. ‘에버랜드’ 직원이라고 했다. 용인 자연농원이 그해 3월 개장 20주년을 맞아 에버랜드로 이름을 바꿨다고 설명해줬다. 사장님이 한번 찾아뵙고 긴히 논의할 게 있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장님은 에버랜드를 세계 5대 테마파크로 만든 삼성의 최장수 CEO 허태학(77)씨였다. 직원 한 명과 비지비를 찾아온 허 사장은 에버랜드에 비지비를 열고 싶다고 했다. 믿기 어려웠다. 이제 갓 10여 개 지점에 불과한 비지비에 삼성이 동업 제안을 해온 것이니 말이다. 이유는 ‘맛’이었다. 디즈니랜드, 씨월드 같은 테마파크에 출장온 직원들이 비지비에 들렀다가 맛에 반했고, 그날 허 사장 역시 일부러 맛을 보러 비지비를 찾았다고 했다. LA갈비, 불고기, 돼지갈비, 매운 닭볶음, 돼지고기 등을 맛 본 허 사장은 그 자리에서 “계약하자”고 했다. 2만 달러를 받고 매상의 4%, 우리 소스를 쓴다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손을 잡았다. 이듬해 1997년 4월 비지비 에버랜드 지점이 문을 열었다. LA에서 한국으로 진출한 대표적인 식당인 북창동순두부가 한국 마포에 처음 문을 연 것이 1998년이었다. 비지니는 그보다 1년 앞서 한국으로 역수출된 LA 한식당인 셈이다. 에버랜드는 5년 계약 기간 동안 비지비 소스 맛을 배웠고 다른 상호명으로 바꿔 운영했다. #은퇴, 또 다른 시작 돌아보면 정말 숨 가쁜 인생이었다. 미국 땅에서 첫 10년간 간호사로, 사업가로, 지역사회 봉사자로 뿌리를 내렸다. 그러면서 두 번째 10년간 꽃을 피웠다. 고맙게도 사람들은 내 삶에서 피워낸 꽃들을 좋아했다. 세 번째 10년에는 그들이 나의 꽃이 되었다. 네 번째 10년, 일흔을 넘기니 이제는 쉴 때도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은 “엄마, 이제 나이가 있으시니 쉬시라”고 종용했다. 2007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32년간 운영해온 비지비를 양도했다. 이듬해 금융위기가 찾아왔으니 딸의 말을 듣고 사업을 정리한 건 행운이었다. 그런데 일상은 더 힘들어졌다. 평생 처음 할 일이 없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날들이 시작됐다.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그 생각을 구체화했다. 마음이 바빠졌다. 그리고 3년만인 2010년 2월, 상상도 못한 사람들과 상상도 못한 일을 하러 상상도 못한 곳으로 함께 향하고 있었다. 아프리카다. 정구현 기자 [email protected]

2021-04-07

[유분자] 한인 가정 불화로 폭행, 살인까지

1980년대 한인이민 폭증 가정 불화로 폭행·살인까지 고 이태영 박사 요청 계기로 1983년 가정법률상담소 개설 ‘이민 가정 파수꾼’ 자원봉사 존폐위기 딛고 대표단체 성장 지금도 ‘그때 그 일’만 생각하면 명치 끝이 아릿하게 아파온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은 상처 때문이다. 미주 최초의 간호정보지인 재미간호신보는 1983년 창간 5년째를 맞아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매달 3000~5000달러에 달하는 적자(당시 내 간호사 월급이 1000달러였다)를 내 주머니돈으로 메워온 신문은 그해 3월 800페이지 분량의 ‘해외한인간호원총람’까지 펴내면서 손익 분기점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일부 간호협회원들이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제기했다. ‘재미간호협회 회장에서 물러난 유분자가 간호신문 발행인을 맡는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신문은 협회의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내게 발행인 사임을 종용했다.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간호신보는 협회에서 도움을 받지 못해 내가 창간했고 재정도 내가 책임져왔다. 어렵게 운영해온 신문이 흑자를 보게 되자 이제 와서 그 결실을 가로채려는 심보였다. 괘씸했다. 자식 같은 신문에 대한 애착도 접기 어려웠다. 소송을 생각했지만 포기하기로 했다. 아무리 내가 옳다 해도 소송하면 ‘한인단체가 싸운다’, ‘간호사들도 별수없네’라고 한인들이 혀를 찰 것이었다. 발행권을 협회에 넘긴 지 5년 만에 신문은 폐간됐다. 믿었던 이들에게 받은 상처는 더 아프다. 빨리 추스르자 결심했던 계기는 더 큰 이타심에 눈을 뜨면서다.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변호사이자 여성운동의 태두인 이태영(1914~1998) 박사다. #이태영 박사와의 만남 누군가를 만나 인생이 크게 달라졌다면, 난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믿는다. 이 박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내 사회생활은 간호계에서만 머물렀을 수 있다. 이화여전을 수석 졸업한 이 박사는 도산 안창호와의 연을 통해 독립운동가인 정일형과 결혼했다. 해방 후 그는 제 2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여성으로 유일하게 합격했다. 아이 넷을 둔 주부가 사시에 합격했으니 전국적인 뉴스였다. 최초의 여성 판사가 될 뻔했지만 남편이 야당의원이라는 이유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반대 때문에 판사로 임용받지 못하고 결국 변호사가 됐다. 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가 1956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설립한 것이다. 이 박사와 가까워진 건 1973년 그가 가정법률상담소 회관(백인회관) 건립 후원 요청차 LA를 찾았을 때다. 강단에 선 그의 말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요즘 여성 지위가 높아졌다고들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자리’를 찾고 있을 뿐이죠.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사람 노릇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10년 뒤 1983년, 한창 상심해있던 내게 이 박사가 “도와달라”고 했다. LA에도 가정상담소를 세우자 했다. 다시 심장이 뛰었다. #가정의 눈물을 닦다 내가 이민 온 1968년을 전후로 미국의 한인 이민자수는 폭증했다. 이민정책연구소 통계에 따르면 1965년 케네디 이민법 개정 이전인 1960년 1만1000명이었던 한인은 1980년 29만 명으로 무려 2600% 이상 늘었다. 한인사회가 발전할수록 여성들의 눈물은 더 깊어졌다. 아직도 ‘명태와 마누라는 두들겨 팰수록 부드러워진다’는 말이 남성들 입에서 거침없이 나올 때였다. 가정 내 다툼은 폭행, 살인까지 이어졌다. 이 박사의 상담소 설립 제안은 한인사회의 시대적 필요와 맞아떨어졌다. 가정을 간호해야 할 때였다. 1983년 1월 나와 석진영, 시몬 킹, 리나 리 등이 가정법률상담소 LA지부 창립 발기인이 돼 설립의 씨앗을 뿌렸다. 반년 뒤인 그해 7월16일 올림피아 호텔에서 창립 총회를 열고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남가주지부(현 한인가정상담소)라는 명칭으로 단체가 설립됐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서 파견나온 양정자 부소장이 아니었다면 어려웠던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LA지부가 처음 자리 잡은 곳은 LA가 아니라 오렌지카운티였다. 설립 실무를 맡은 나와 석진영 선생의 생활 터전이 오렌지카운티였기에 애너하임 지역에 사무실을 마련했다. 그리고 몇 달 후 상담소 후원자였던 웨스턴 뷰티 칼리지의 비키 박 회장이 LA한인타운내 본인 소유의 건물 한 공간을 무료로 임대해줘 그곳에 둥지를 틀었다. 상담소 초기 어려움이 참 많았다. 수입이라고 해봐야 이사회비와 평생 회원들이 내는 기부금이 전부였다. 타자기, 책상, 자동응답기 등 사무기기는 기증받아야 했다. 초대 소장을 맡은 김신형씨와 부소장 임승향, 김혜숙씨 등 직원들은 자원봉사로 살림을 꾸렸다. 설령 재정이 풍부 했다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고통받는 이웃을 생각하면 한 푼이라도 아껴서 살림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초창기 실무진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 희생을 밑거름으로 세워진 상담소는 번민하는 한인 가정의 곁을 38년간 변함없이 지켰고, 연예산 500만달러가 넘는 한인 대표단체로 성장했다. #비온 뒤 땅이 굳 듯 지난 세월 가정상담소가 평탄하게만 운영된 것은 아니었다. 존폐 위기까지 몰고 간 사태가 창설 18년만인 2001년 6월에 벌어졌다. 어느날 중앙일보를 펼쳐들었는데 가정상담소와 청소년회관(KYCC) 사이에 합병이 논의되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보도였다. <본지 2001년 6월15일자 A-3면>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결국 예산 문제였다. 상담소가 LA카운티 아동복지국에 신청했던 25만 달러의 기금을 받지 못하게 돼 심각한 재정 위기에 처했고, 상담 프로그램만이라도 살리기 위해 불가피하게 합병을 고려중이라고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선 상담소는 한인 1세들의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관이었다. 1.5세와 2세 청소년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단체가 맡을 역할이 아니었다. 통합을 추진한 실무진에도 화가 났다. 이민가정의 파수꾼이어야 할 실무진이 예산 부족을 이유로 타 단체와 합병을 추진하는 것은 그야말로 봉사의 의미를 모르는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창립 1세대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적극 반대했고, 언론사에 기고문을 게재해 상담소 필요성을 역설했다. 통합 보도가 난 지 1주일 뒤인 23일 이사회에서 합병 계획은 반대 7표, 찬성 6표, 단 한 표 차로 없던 일로 됐다. 그 후 상담소는 이사진 전원이 교체되는 진통을 겪고 다시 살아났고, 흔들림 없는 뿌리 깊은 나무로 한인사회 버팀목이 되고 있다. 지금도 가끔 가정상담소 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유사 상담 기관이 많고 무엇보다 교회에서도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데 굳이 필요하냐고 묻는 이들이다. 그럴 때 마다 난 미주 한인 교계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나성영락교회의 김계용(1990년 작고) 초대 담임목사의 말씀으로 답을 대신한다. “교회가 성도의 가정 문제를 상담하면 성공해도 교인을 잃고 실패해도 교인을 잃습니다.” 정구현 기자 [email protected]

2021-03-31

[유분자] ‘족집게 문제집’ 구해 한인 간호사 1만명

RN 필기시험 의무화 조치로 영어 미숙 한인 낙방 다반사 1973년 남가주간호협 재건 한국어 강의 개설 적극 지원 '비밀 문제집'덕 합격률 80% 나는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라는 말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귀한 직업과 천한 직업을 분류하는 나만의 기준은 ‘사회에 도움이 되느냐, 해악을 끼치느냐’는 것이다. 간호라는 업의 귀함은 사회적 위치가 아니라 귀한 생명을 돌보는 데 있다. 1960년대 말 취업 이민온 한인 간호사들의 생업은 귀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삶 자체가 헌신이었다. 대부분 남편보다 돈을 많이 버는, 이른바 ‘알파 어너(alpha earner)’로서 가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풀타임으로 근무해야 했다. 업무에 지친 몸을 끌고 집에 와서도 가사와 육아는 당연히 ‘엄마’의 의무였다. 벌이를 쪼개 한국에 있는 가족들의 생활비와 형제 자매들의 학자금으로 송금하는 효녀들이기도 했다. 수퍼우먼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삶이었다. 그들의 생업은 1970년 RN(Registered Nurse) 자격증의 필기시험이 의무화되면서 위기를 맞았다. 정부로서는 외국 경력 간호사들의 현장 근무를 위한 안전장치였지만, 한인 간호사들로선 넘기 힘든 벽이었다. 3수, 4수는 기본이었다. 간호사를 포기하고 봉제공장, 식당에 취업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생명을 돌보는 이들이 귀한 업을 저버리고 있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남가주간호협회 재탄생 난관을 넘는 정답은 ‘함께’다. 미국에 먼저 온 동료 간호사들에게 수소문해보니 1969년에 나성한인간호원협회가 조직됐지만 비영리단체로 정식 등록되지도 않았고 실질적인 활동도 많지 않다고 했다. 조직을 재건하기로 했다. 텍사스에서 LA로 온 지 2년만인 1972년 8월19일 단체는 재탄생했다. 당시 한국 대한간호협회장인 홍신영 선생의 미국 방문 환영식이 열린 날로 맞췄다. 참석한 여러 간호대학 동문회 대표들은 그 자리에서 날 만장일치로 회장으로 추대했다. 단체명을 남가주한인간호협회로 바꾸고 민병수 변호사를 통해 비영리단체 등록을 한 뒤 곧바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첫 번째 목표는 당연히 동료 간호사들의 RN 시험 합격 지원으로 정했다. 당시 RN 지원생들이 몰리던 곳은 LA시티칼리지의 ‘외국인을 위한 RN 클래스’가 유일했다. 하지만 영어 강의였기에 회화 실력이 부족한 한인들로선 시험 합격은커녕 수업을 따라가기도 벅찼다. 이듬해인 1973년 11월5일 수강생 20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상 첫 한국어 강의인 제 1기 RN 클래스를 개강했다. RN시험은 5개 과목이다. 내과, 외과, 소아과, 정신과, 산부인과를 김정숙, 송장난, 이설자, 장재옥씨가 강사를 맡아 가르쳤다. 자원봉사를 한 강사들이나 생업을 걸고 공부한 학생들이나 모두 절실했다. 첫 시험에서 1기생 20명 중 7명이 합격했다. 좋은 성적이었지만 아직 부족했다. 고민하던 차에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들었다. 필리핀계 간호사들의 합격률은 거의 100%였는데 그 이유가 자기들끼리만 공유하는 ‘족집게 예상문제집’, 족보 덕분이라고 했다. 반드시 손에 넣어야 했다. #다이아몬드 알을 낳는 족보 궁하면 통한다. 나중에 미주 한인 간호사들의 운명을 결정지은 그날은 거짓말처럼 찾아왔다. RN시험을 보는 후배들을 응원하러 시험장에 나갔던 참이었다. 화장실에서 우연히 필리핀계 여성과 마주쳤다. 손에 든 책을 보며 중얼중얼 외우고 있었다. ‘저거다, 족보구나!’ 속으로 직감했다. 할 말이 있다고 그녀 손을 잡아 끌고 가서 책을 보여줄 수 있느냐 부탁했다. 100개에 가까운 객관식 문제와 답이 빼곡했다.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몽땅 꺼내 그녀에게 쥐여주며 문제집을 넘겨달라 부탁했다. 대충 50달러가 넘는 돈을 받아든 그녀는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난 더는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생큐”하고는 책을 품고 그 자리를 떴다. 시험장을 나온 나는 곧바로 협회 임원들에게 연락했다. 예상문제집을 얻었으니 시험 준비생들에게 내일 모두 ‘무궁화학원’으로 오라고 했다. 그 다음날 수백 명의 시험준비생들이 무궁화학원 앞에 장사진을 쳤다. 짐작대로 그 문제집은 황금알 정도가 아니라 다이아몬드알을 낳는 거위였다. 문제집을 바탕으로 공부한 결과 합격률이 80%를 넘어섰다. 그후 30여년간 RN 리뷰 클래스를 통해 RN 시험에 합격한 간호사들은 LA만 3000명이고 전국 각지에 1만 명이 넘는다. 전문직 해외 이민의 효시이자 본류인 한인 간호사들이 미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운 RN 클래스는 지금 생각해도 내 생애 가장 보람있는 일이다. #미주 전역을 하나로 RN 리뷰 클래스는 전국적인 히트를 쳤다. 콜로라도, 워싱턴, 펜실베이니아, 뉴욕 등 타주에서 강의 참여방법을 묻는 전화가 쇄도했다. 협회 임원들은 주 7일 밤낮없이 걸려오는 문의 전화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가족들에게 미안해 밤에는 집전화 코드를 뽑아놓기까지 할 정도였다. 중력의 법칙은 단체에도 작용한다. 핵심의 질량이 단단해지면 외연은 순식간에 확장한다. RN 클래스로 미주 전역 한인 간호사들에게 단체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걸 확인한 나는 전국의 한인 간호사들을 하나로 모으기로 했다. 마침내 1976년 7월30일, 재미한인간호협회(현 재외간호사회)가 창설됐다. 7000명을 헤아리는 북미 전역 한인 간호사들의 권익단체가 출범한 것이다. 초대 회장을 맡은 나는 학술대회를 매개로 간호 업무의 내실을 다지는 동시에 한국, 미국 주류사회와 네트워크를 이었다. 2년 뒤인 1978년 한국 대한간호협회와 공동으로 1회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미국의 한인 간호사 대표들이 학술회의를 위해 귀국한 사실은 당시 한국 주요신문들이 앞다퉈 보도했다. 재미한인간호협회의 정점은 1983년 전세계 93개국, 6000여 명이 참가해 LA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 19차 국제간호협의회(ICN) 총회에서 빛을 발했다. 당시 150여 명의 한인 간호사들은 빠짐없이 한복을 입고 참석해 대회의 꽃으로 떠올랐고, 각종 토론을 주도했다. #팔자에 없는 신문 발행 뭉쳐야 산다는 생각과 한명이라도 더 간호사 시험에 합격시키려 했던 노력은 신문까지 발행하게 만들었다. RN 리뷰 클래스 강의 내용을 손쉽게 알려줄 수 있는 최적의 도구가 신문이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쉽지 않았다. 지금은 컴퓨터 기술이 발달해 혼자서도 신문을 만들 수 있지만 당시엔 모든 걸 말 그대로 발로 뛰어야 했다. 기자가 원고지에 기사를 작성하면 원고를 식자로 쳐서 카메라로 찍어 조판을 한 뒤에야 인쇄를 할 수 있었다. 운영 비용도 큰 난제였다. 당시 간호사로 받던 내 월급이 1000달러 남짓이었는데 매달 인건비만 4000달러를 지출하느라 저금했던 돈까지 퍼부어야 했다. 수많은 이들이 피와 땀을 쏟은 끝에 1979년 새해 벽두인 1월5일 월간지인 ‘재미간호신보’ 창간호가 나왔다. 정말 시작은 반이라는 말이 맞았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창간 한 달 만에 시카고, 댈러스, 뉴욕, 캐나다에 지국을 열었고, 3호가 발행된 1979년 3월에는 독일 지국까지 열었다. 독자들은 알찬 내용들을 손꼽아 기다렸다. ‘나의 수험기’라는 RN 시험 체험기, 서동성 변호사가 집필한 ‘간호사를 위한 소송 법률 상식’, 전국 병원의 간호사 취업정보, ‘한인 간호사, 이런 점은 고쳐야 한다’는 설문조사, 간호사와 의사 커플의 알콩달콩 일상을 다룬 ‘우리는 부부’라는 인터뷰 코너 등은 히트를 쳤다. 이하성 소아과 전문의, 권중건 교정치과 전문의 등 현재 각 분야에서 권위자 반열에 있는 전문의들이 좋은 원고를 보내준 것도 신문에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창간 5년째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신문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구현 기자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2021-03-24

[유분자] “13년차 간호사 맞아?”…이를 악물었다

1년 계약에 텍사스 근무 시작 말 어렵고 고된 업무 ‘이중고’ 손가락질 싫어 끼니 거르고 일 LA와서도 ‘무덤조’ 밤샘 근무 투잡 뛰며 2년만에 가족 초청 필기시험 의무화 "뭔가하자" 1968년은 격동의 시기였다. 그해를 중심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3개 기업이 태동했다. 현대자동차(1967년 12월), 포항제철(1968년 4월), 삼성전자(1969년 1월)가 출범했다. 한국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도 그해 개통했다. 경제의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지만, 아직 한국은 가난했다. 그해 세계 평균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702달러였는데 한국은 3분의 1수준도 안 되는 190달러였다. 넉넉한 살림살이의 기준은 집 전화가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됐다. 삶은 불안했다. 북한 무장게릴라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1·21사태)은 전쟁의 악몽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임을 실감케 했다. 간호사라는 직업 덕분에 이민을 결심했지만, 두 아이와 남편을 한국에 두고 먼저 올 수밖에 없었다. #새 하늘 새 땅, 딱정벌레차 “We’ll land shortly at Los Angeles…” 먼길이었다. 기상악화로 일본 하네다에서 하루를 묵고 또 스무 시간 가까이 날아왔다. 도착 기내방송에 창밖을 내다봤다. 하늘에서 LA를 처음 내려다 본 이민자들은 아마 그때 내 심정을 공감할 터다. 광활하다는 말은 미국을 뜻했다. 북쪽의 높은 산맥과 동쪽의 끝없는 사막, 서쪽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도시는 바둑판처럼 반듯했다. 새 하늘 새 땅의 첫인상이었다. 이민자들에게는 공항에 마중나온 사람의 영향이 크다. 내 경우는 대전간호학교 동기이자 KSC 병원에서도 함께 근무한 죽마고우 이신자였다. 그날 신자는 공항에 일명 ‘딱정벌레차’인 검은색 소형 복스웨건을 몰고 왔다. 신자가 어떤 차를 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직접 자동차를 몰고 온 사실은 내게 충격 그 자체였다. 당시 한국에서 여성 운전자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친구의 ‘자가용’은 내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기 충분했다. LA가 크고 풍성했던 것도 ‘아메리칸 드림’을 재촉했다. K마트라는 곳에서 난생 처음 컬러TV를 봤고, 한국에선 구경하기 힘든 바나나를 사과보다 싸게 팔았다. 크리스마스를 LA에서 보내고 1년 고용 계약을 한 텍사스로 다시 떠났다. 잘 살기 위해 미국에 왔으니 이제 돈을 버는 일만 남았다. #‘pooped’ 공화국에서 내 이민살이의 시작도 고생이었다. 1969년 새해 첫날부터 일하게 된 파클랜드 메모리얼 병원에서의 간호사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처음 부딪힌 건 언어문제였다. 한국에서 미국인 간호사들과 오래 근무했던 터라 영어가 두렵진 않았는데 막상 근무현장에서 부딪힌 말은 내가 아는 잉글리시가 아니었다. 텍사스를 공화국이라고 생각하는 토박이 텍산(Texan)들의 억양과 속어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피곤할 때 ‘타이어드(tired)’를 그들은 ‘풉드(pooped)’라고 했다. ‘오 마이 갓!(Oh my god!)’이라는 탄식어는 ‘머시(Mercy)’라고 했다. 내가 알아듣건 말 건 의사는 물론 간호사들도 한 번 말하고는 그뿐이었다. 그러니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말을 이해 못 해 환자를 잘못 간호한다면 하루 아침에 병원에서 쫓겨날 수 있었다. 언어만큼이나 힘든 건 간호사 업무 그 자체였다. 한국에서 13년간 간호경력을 쌓았지만 미국 오기 전 수년간은 행정 업무를 했기에 진료 현장에서 손 뗀지 오래였다. 고생은 당연했다. 다른 간호사가 한 시간 만에 할 일을 몇 시간씩 붙잡고 있을 때가 허다했다. 약 이름 외우랴, 환자 돌보랴 내 무능력 탓에 끼니 거르길 밥 먹듯 했다. 밥을 포기하게 만든 건 자존심이다. “저 사람 십 몇 년 간호사 한 거 맞아?”하는 빈정거림이 뒤통수를 파고 드는 것 같았다. 52kg이었던 몸무게는 한 달 만에 45kg으로 7kg이나 줄었다. 한국서 잘나가던 간호사 유분자는 없었다. 처음부터 다시 배우자 이를 악물었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다. 3개월이 지나자 적응하기 시작했다. 운전면허를 따고 당시 월급과 맞먹는 거금 600달러를 주고 차를 샀다. 투잡을 뛰기 위해서였다. 두 블록 떨어진 다른 병원에 지원해 일했다. ‘월화수목금금금’의 1년 텍사스 생활은 텍산말처럼 ‘풉드(녹초)’ 그 자체였다. #LA의 ‘무덤번’교대조 1970년 정초 LA로 돌아와 벨플라워의 카이저 병원에서 취직했다. 텍사스보다 업무는 훨씬 수월했다. 현장 진료에 익숙해진데다 급료도 훨씬 많았다. LA에 정착하고 한숨 돌리니 그리움이 몇 배로 사무쳤다. 엄마의 손길이 가장 필요할 때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는 것은 말로 하기 어려운 고통이다. 당시 국제전화비는 5분 통화에 40달러가 넘을 정도로 비쌌다. 하지만 수시로 한국에 전화를 걸어 아이들에게 보고싶다고 사랑한다고 울먹였다. 가족들을 데려와야 했다. 카이저병원 근무를 시작한 지 4개월 만에 한국으로 날아가 여섯살 큰딸부터 데려왔다. 아직 어렸던 세 살 막내아들은 2년 뒤에야 왔고, 남편(이규철씨·2010년 작고)이 이듬해 따라왔다. 가족이 다시 함께 살게되면서 다들 기피하는 ‘밤번(night shift)’을 자청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오후 11시부터 이튿날 아침 7시까지 밤샘 근무조는 급여가 15% 많았다. 또 다른 이유는 낮에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밤에 일하고 낮에 아이들을 돌보니 만성적인 수면부족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새벽 1시쯤 잠든 환자들을 보면 옆 침대에 들어가 같이 자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밤번은 진이 빠지고 기름을 빼는 일이었다. 오죽했으면 ‘무덤번(graveyard shift)’이라 불렀겠는가. 3년 만에 밤번을 그만두고 대신 투잡을 뛰었다. 주 5일 근무후 주말 이틀간은 사우스게이트에 있는 양로 병원에서 수퍼바이저로 일했다. 돈도 돈이지만 나중에 꼭 한번 양로병원을 운영하고 싶었다. 그 꿈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꾸고 있다. 몸은 고되도 투잡 근무덕에 은행 잔고는 한여름 무밭에서 무가 자라듯 쑥쑥 불어났다. 1년간 7000달러를 모았을 정도였다. 삶이 넉넉해지면 주변이 보인다. 1970년 간호사 제도에 큰 변화가 생긴 것도 동료 간호사들을 돌아보게 한 계기다. 그 전까지는 한국에서 온 간호사들은 필기 없이 면접만 통과하면 RN(Registered Nurse)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70년 이후 필기시험을 의무화했다. 뭉쳐야 살 수 있는 때였다. 뭔가 해야만 했다. ※유분자 이사장 약력 ▶출생: 1935년 충청북도 옥천 출생 ▶학력: 대전여중(1952), 대전간호학교(1955), 숙명여대 약학과 입학(1955), 덕성여대 국문과(1959) 졸업 ▶미8군 KSC 병원 간호과장, 대한적십자사 초대간호사업 국장 ▶1968년 도미 ▶텍사스 파크랜드 병원, 벨플라워 카이저 병원 RN 근무 ▶남가주한인간호사협회 2대 회장, 재미간호협회 초대회장, LAㆍOC 가정법률상담소 이사장, 재미간호신보ㆍ해외한인간호원총람 발행인, 소망소사이어티 이사장 ▶1983년 패스트푸드 체인 비지비(Busy Bee) 설립 ▶포상: 보건사회부 장관 감사패(1978), 재미간호협회 공로패(1986),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공로 표창(1986), 가주하원 공로패(1992), 사단법인 여성재단 감사패(2002) 등 ▶저서: 내일은 다른 해가 뜬다(2006), 그래서 삶은 아름답다(2016) 정구현 기자 [email protected]

2021-03-17

한국어 RN 취득코스 만든 개척자…‘간호사의 대모’ 유분자

차범석의 희곡 ‘불모지’가 수록된 책의 제목은 ‘껍질이 째지는 아픔 없이는’이다. 거칠고 메마른 땅에 떨어진 이들의 고통이다. 지난해 연말부터 미주중앙일보가 연재해온 ‘남기고 싶은 이야기’도 째지는 아픔 없이는 남길 수 없었던 이들의 사연이다. 척박한 삶에서 ‘처음’이라는 싹을 틔운 한인 이민자들의 역사를 연재했다. 민병수(87) 변호사, 벤자민 홍(한국명 홍병각·88) 행장, 토마스 정(한국명 정용봉·94) 회장을 차례로 인터뷰했다. 네 번째 인물도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한인사회 굴곡을 함께 해온 개척자다. ‘간호사의 대모’로 불리는 유분자(85) 소망소사이어티 이사장이다. 유 이사장은 전쟁통에 간호학교를 나와 간호행정가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케네디 이민개정법(1965년)으로 이민러시가 한창이던 1968년 32살에 도미했다. 고된 이민생활에서도 이타적인 직업은 동료 간호사 돕기로 이어졌다. 1971년 남가주 한인간호협회를 재창설했다. 그가 만든 한국어 RN 자격증 취득코스를 통해 미국 전역에서 1만명이 넘는 한인 RN 간호사가 탄생했다. 1983년엔 ‘비지비(Busy Bee)’라는 한식 패스트푸드 체인을 세워 여성 기업가로도 성공했다. LA 가정법률상담소 창립을 주도하는 등 사회사업에도 기여했다. 2007년 일흔이 넘은 나이에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는 비영리단체 ‘소망소사이어티’를 창립해 현재까지 이사장을 맡고 있다. 격변의 세월, 그가 겪어야 했던 ‘껍질이 째지는 아픔’을 남긴다. 관계기사: 세 살, 한 살 아이 두고 '미래' 찾아 한국 떠나

2021-03-10

[유분자] 세 살, 한 살 아이 두고 '미래' 찾아 한국 떠나

15대1의 경쟁 뚫고 대전간호학교 입학 간호행정가 '꽃길' 포기 미국 병원 취업 1968년 12월11일. 53년 전 그날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꼬리날개에 노스웨스트항공 DC-7C이 적힌 비행기에 올랐다. 차창 밖 내리던 비처럼 진작부터 흐르던 눈물은 좌석에 앉자마자 왈칵 쏟아졌다. 한창 재롱부리는 세 살 딸과 첫돌을 갓 넘긴 아들이 어른거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어미가 돼서 이리 냉정한 결심을 했나.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낯선 땅에 대한 두려움이 더해 자책은 깊어졌다. 얼마나 울었을까. 폭우로 비행기가 일본에 비상착륙한다는 기내방송이 들렸다. 비행기 바퀴가 땅에 닿자 눈물은 거짓말처럼 멎었다. 일부러 작정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나라에 도착하고 나니 이제부터 혼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는 현실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미국까지 갈 길은 아직 멀었다. 눈을 감았다. 이민을 선택해야 했던 서른 두 해 삶을 떠올렸다. #백발 노신사, “뭉쳐야 산다” 1935년 충북 옥천군 옥천읍 죽향리에서 3남4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나보다 열살 위인 고 육영수 여사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그 시절 어린 나이에도 일제의 압박과 수탈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총각들은 학도병으로, 처녀들은 위안부로 잡아갔다. 시골사람들에게 해방이라는 말은 자유라는 어려운 단어보다 더 이상 끌려가지 않아도 되는 안도감을 뜻했다. 해방되던 해 ‘그 날 그 자리’엔 어떻게 갔었는지 모른다. 동네 어른들이 줄지어 가는 길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갔을 수도 있다. 미국에서 귀국했다는 백발의 노신사가 광장의 연단에 올라섰다.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그는 신선처럼 보였다. 백발의 할아버지는 떨리는 듯한 목소리로 절규하듯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네다.” 광장을 메아리치던 이승만 박사의 절규와 청중들의 박수는 열살 소녀에게 ‘나’보다 ‘우리’를 각인시켰다. 이타적인 직업과 봉사하는 삶은 운명처럼 자연스러웠다. 16살에 대전간호학교에 입학했다. #15:1 경쟁률, 백의를 입다 지금은 간호사가 되려면 대학을 나와야 하지만 당시에는 3년제 고교 과정만 마치면 정식 간호사가 될 수 있었다. 대전간호학교에 입학한 해는 1952년이다. 전쟁 통에 가난이 일상이던 시절이다. 대전간호학교는 학비, 숙식을 나라에서 지원해줬다. 공부 잘하는 재원들이 몰리는 건 당연했다. 줄곧 우등생이었던 나는 15:1의 경쟁률을 뚫고 20명 신입생에 뽑혔다. 동기 중 난 유일하게 퇴학당했다가 복학된 이력이 있다. 어릴 때부터 좋게 말하면 정의감, 나쁘게 말하면 ‘반골 기질’이 강했다. 부당한 일은 두고 보지 못했다. 사달이 난 건 부실하기 짝이 없는 학교 식단 때문이었다. 매일 꽁보리밥에 된장국만 먹었다. 동기생들을 모아 단체로 항의하자 학교 측은 주모자인 나를 퇴학하는 것으로 맞섰다. 간호학교 사상 초유의 퇴학 사건은 사흘 만에 없었던 일로 마무리됐는데 첫 번째 이유는 전교생이 교장 선생님께 내 복학을 요구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어머니의 간곡한 설득 덕분이다. 학교에서 쫓겨나길 각오했던 데모 소동에 급식은 많이 개선됐다. 동기생 20명 중 절반 이상인 11명이 지금 미국에 살고 있는데 만날 때마다 아직도 그때 내 무모한 용기는 수다의 단골 주제다. #KSC 병원의 ‘박순천 여사’ 간호학교를 졸업한 뒤 세브란스 병원 간호사로 1년간 본격적인 실무를 익혔고 이듬해인 1956년 미8군의 노무자병원(Korean Service Corp·KSC)에 취업했다. 한국 전쟁 직후 미군은 전국 각지에 군사시설을 지으면서 한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했는데 그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1953년 세워진 KSC였다. 노무자병원은 어감이 좀 이상하지만 당시 한국의 어떤 병원보다 좋은 의약품이 흔하고 의료 시설이 뛰어난 곳이었다. 월급도 웬만한 종합병원보다 2배 많았다. 간호학교 때처럼 또 바늘구멍을 통과해 KSC에 취직했다. 하늘의 별을 딴 나는 내친김에 대학 진학의 꿈을 다시 키웠다. 낮에는 학원과 도서실에서 코피를 쏟아가며 공부했고, 숙명여대 약대에 합격했다. 입학보다 어려웠던 건 학업과 직장의 병행이었다. 왕복 3시간씩 통학하고 낮에는 학교 다니고 밤번 근무가 계속되면서 늑막염까지 걸려 1학년을 마치고 학업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듬해 덕성여대 국문과에 편입해 3년 만에 학사모를 쓰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KSC에서 1967년까지 11년간 일하면서 대학 졸업장보다 더 큰 소득은 다른 세상들을 경험한 것이었다. 당시 한국은 철저하게 남성위주의 계급사회였다. 하지만 KSC 내에서만큼은 업무가 합리적이었고 여성에게 기회가 보장됐다. 취직 4년 만에 간호과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간호과장이 되면서 ‘박순천 여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박순천(1898~1983) 여사는 여성 최다선(5선) 국회의원 기록을 가진 대한민국 여성 정치인의 시초다. 자유당 시절 부산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남성 후보들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공격하자 “오죽 사내들이 못났으면 암탉이 나와서 이렇게 울어 대야 하는가”하고 응수했던 당찬 여성이었다. 박순천 여사처럼 난 타협하지 않았다. 한국인들 사이에 만연했던 취업 청탁을 사절했고, 관행 같았던 의약품 반출 비리에 일절 가담하지 않았다. 그렇게 탄탄하던 직장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건 1967년이다. 종전 후 10년 넘는 세월이 지나면서 미군 시설 공사가 마무리되자 한국인 노무자 수가 현저히 줄었고 KSC도 문을 닫게 됐다.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간호행정가, 미래를 찾아 KSC가 폐원한 뒤 대한간호협회 서울시 지부 사업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6개월이 지난 1968년 1월 갑자기 대한적십자사에서 차출 명령이 떨어졌다. 신설된 사업국장에 날 임명했는데 공무원으로 치면 이사관급은 되는 높은 자리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초대 간호사업국장을 맡게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적십자사 세계본부에서 주최한 ‘가정 간호(Home Care)’ 세미나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가정간호가 일반화됐지만, 그 당시 한국에는 가정 간호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세미나에 강사로 왔던 본부사업국장에게 열성적으로 질문을 던졌었는데 내 이름을 기억한 그녀가 날 한국 사업국장으로 추천한 것이었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간호행정가의 자리에 올랐지만 근무 몇 개월만에 일할 곳이 못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KSC에서의 11년간 근무 경험이 사표를 낼 결심을 하게 했다. KSC는 내게 ‘미국의 맛’을 보게 했다. 미국 문화의 합리성과 포용성에 매료됐던 난 상명하복, 복지부동의 관행에 거부감이 심했다. 특히 여성을 하대하는 직장 분위기는 견디기 어려웠다. 간호학교 졸업 후 13년간 꽃길만 걸어오다 그제야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뼈저리게 눈에 들어왔다. 찢어지게 가난하고 부정부패가 만연한 나라였다. 당시 어디서든 들려오던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는 역설적으로 암울한 현실을 뜻했다. 미래는 여기에 없었다. 미국 병원에 취업 원서를 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연세대 출신 간호사들이 여럿 텍사스 파크랜드 병원에 취업해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원서를 냈고 취업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미련없이 사표를 던졌다. 1968년 11월5일이었다. 그리고 한 달 1주일 뒤 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작은 가방 하나에는 간호영어사전과 옷 몇 벌, 고추장과 멸치볶음이 전부였고 주머니에는 달랑 300달러만 들어있을 뿐이었다. 눈을 떠보니 비행기는 LA 상공 위를 날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미국의 단맛은 짜디짠 땀 맛이었다. 상상하지 못할 고통이 곧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정구현 기자 [email protected]

2021-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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